문화
국민들 위로해 주던 가요, 이젠 글로벌 한류 선봉장으로
입력 2015-08-12 11:56 
젊은 시절 조용필

대중가요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히트곡들은 당시 한국 사회 아픔과 기쁨을 노래했다. 반대로 가요가 사회에 미친 영향도 적지 않았다. 우리의 가요는 일제 강점기, 전쟁, 산업화, 민주화로 대표되는 질곡의 근현대사와 함께 했다.
한국 최초의 대중가요로는 대체로 ‘사의 찬미 ‘낙화유수 ‘황성옛터가 언급된다. 1920년대 발표곡들이다. 광복 전엔 나라 잃은 설움을 노래한 곡들이 많은 사랑을 받았다. 대표곡은 바로 1936년 발표된 ‘눈물 젖은 두만강(김정구 노래·김용호 작사·이시우 작곡)이다. 노래는 1935년 간도땅으로 유랑공연을 떠난 이시우 선생(1913~1975)이 국경수비대 일본 헌병이 쏜 총탄에 남편을 잃은 한 여인의 기구한 사연을 듣고 만들었다. 눈물 젖은 두만강은 우수에 찬 멜로디와 절절한 가사가 당시 대중 마음을 파고들면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1945년 8월 15일 이후엔 광복의 감격을 노래한 가요들이 쏟아져 나왔다. 손석룡이 노래한 ‘귀국선(손노원 작사·이재호 작곡)은 ‘돌아오네 돌아오네/고국산천 찾아서/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꽃을이라고 했다. 1948년 장세정이 부른 히트곡 ‘울어라 은방울(조명암 작사·김해송 작곡)은 정부 수립을 염원했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나선 전쟁의 참혹함과 실향·이산의 아픔을 노래한 가요가 많았다. 현인이 부른 ‘굳세어라 금순아(1953년·박시춘 작곡·강사랑 작사)는 1950년 민간인 10만명을 피난시킨 ‘흥남철수작전의 혼란 속에서 생이별을 한 금순이를 부산 국제시장에 정착한 화자가 애타게 찾는 내용이다. 굳세어라 금순아는 당시 국민가요로 불릴 만큼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지난해 개봉한 영화 ‘국제시장에 삽입곡으로 쓰이면서 재조명받았다.

1960년대는 여가수들 전성시대였다. 이미자와 패티김은 시대를 주름잡는 아이콘이었다. 전쟁 후 재건에 열중한 당시엔 빠른 템포에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노래가 큰 인기를 끌었다. 대표곡은 한명숙이 부른 ‘노란샤쓰의 사나이(1961년·손석우 작사작곡)다. 사랑 표현에 적극적인 화자를 전면에 내세운점, 당시로선 생소한 미국 컨트리송풍 멜로디를 차용한 점 등이 이전 시대와 차별화된다. 1969년 패티김이 부른 밝은 분위기의 노래 ‘서울의 찬가(길옥윤 작사작곡)도 비관·우울에 빠져 있던 전쟁 직후 정서가 바뀌고 있다는 점을 방증하는 노래다.
1970년대 초반 가요계는 남진과 나훈아 경쟁 구도였다. 둘 모두 ‘오빠 부대를 몰고 다니며 경쟁적으로 세를 과시할 정도였다. 특히 1972년에는 남진의 대표곡인 ‘님과 함께와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가 한꺼번에 발표되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언더그라운드에선 포크록 장르가 꽃을 피웠다. 김민기 신중현 송창식 등으로 대표되는 싱어송라이터들은 국내 대중음악 발전에 초석을 닦았다는 평가다. 서울 무교동 음악감상실 ‘쎄씨봉 출신 가수 조영남, 윤형주, 이장희, 김세환 등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70년대엔 박정희 정권의 규제로 금지곡으로 묶인 노래가 많았다. 송창식 노래 ‘고래사냥(1971년)과 ‘왜 불러(1975년)가 대표적이다. 각각 ‘불순한 내용을 연상시킨다, ‘반항적인 정서를 일으킨다는 이유였다. 양희은의 ‘아침이슬(1970년)도 운동권 학생들 사이에서 자주 불렸다는 사실 때문에 금지곡이 됐다. 하지만 정부 의도와는 반대로 이들 노래는 청년들 사이에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가왕 조용필은 1980년대 가요계를 주름잡았다. 공전의 히트를 친 ‘돌아와요 부산항에(1975년)로 명성을 얻은 그는 4년 뒤 공식 데뷔했다. 이후 ‘모나리자 ‘서울 서울 서울 등 노래가 잇달아 인기를 얻으면서 1980년대 대중음악계 영웅으로 탄생했다. 스스로 작사·작곡을 하는 싱어송라이터로서, 타인의 작품을 훌륭하게 소화해내는 보컬리스트로서도 출중한 역량을 선보였다. 록, 발라드, 트로트, 민요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선보이는 한편 대중성과 음악성을 모두 만족시킨 선구자적 뮤지션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그룹사운드의 활약도 돋보인다. 김창완 주도의 ‘산울림, 전인권 주축의 ‘들국화, 구창모·배철수 투톱의 ‘송골매 등이 대표적이다. 1980년대 중반 이후엔 이문세와 이승철, 이선희가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90년대엔 ‘서태지와 아이들이 혜성처럼 등장해 당시 10~20대 청소년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으로 대중과 평단의 주목을 동시에 받았다.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족해…이 시꺼먼 교실에서만/내 젊음을 보내기는 너무 아까워(1994년 교실이데아) ‘아직 우린 젊기에/괜찮은 미래가 있기에/자 이제 그 차가운 눈물을 닦고/컴백홈(1995년 컴백홈) 같은 노래가 큰 인기를 끌었다.
팬문화 주도권이 젊은층에게 넘어가게 된 것도 이 시기다. 1990년대엔 산업화와 민주화 혜택을 동시에 입은 ‘X세대(1980년대 전후 출생)가 당대 소비문화를 이끌었다. 김건모 박진영 현진영 등 가수들이 댄스음악 전성기를 열었다.
국내 최초의 아이돌 그룹은 SM엔터테인먼트가 1996년 데뷔시킨 5인조 남성그룹 ‘H.O.T.라는 게 대체적인 견해다. 이후 남성그룹 ‘신화 ‘젝스키스 ‘지오디, 걸그룹 ‘SES ‘핑클 등 초창기 아이돌 가수들도 큰 인기를 얻었다. 2000년 데뷔한 ‘보아는 일본 시장 진출에 상업적으로 성공한 최초의 아이돌 가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싸이가 2012년 발표한 ‘강남스타일은 팝 음악 본산인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에 히트를 치면서 K팝을 세계화했다는 분석이다. 최근엔 아이돌 외에도 다양한 장르의 인디밴드들이 등장해 K팝 저변 확대에 일조하고 있다.
[이기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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