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김형오의 시사 엿보기] 헌법 1조1항 '민주공화국'에서 일어난 일
입력 2015-07-08 18:36  | 수정 2015-07-08 20:35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결국 사퇴했습니다.

사퇴의 변은 3분 40초로 짧았지만, 그 함축적 의미는 심오했습니다.

유승민 원내대표의 말을 분석해보죠.

▶ 인터뷰 : 유승민 / 새누리당 원내대표 (오늘 사퇴회견)
- "오늘 아침 여의도에 오는 길에 지난 16년간 매일 물었던 질문을 또 했습니다. 나는 왜 정치를 하는가. 정치는 현실에 발을 딛고 열린 가슴으로 숭고한 가치 추구하는 것입니다. 진흙에서 연꽃 피우듯 아무리 욕먹어도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정치라는 신념 하나로 정치 해왔습니다."

아무리 욕을 먹어도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정치라고 했습니다.


비록 진흙탕 정치판에서 뒹글고 있어도, 연꽃을 피우겠다는 신념 하나로 버티어왔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 정치는 현실에 발을 딛고 있어야하니까요.



진흙탕 같은 정치에 발을 딛지 않고는 그 정치를 바꿀 수 없고, 연꽃을 피울 수 없다는 신념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 인터뷰 : 유승민 / 새누리당 원내대표 (오늘 사퇴회견)
- "평소 같았으면 진작 던졌을 원내대표 자리를 끝내 던지지 않았던 건 제가 지키고 싶었던 가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법과 원칙, 그리고 정의입니다. 제 정치 생명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오늘이 다소 혼란스럽고 불편하더라도 누군가는 그 가치에 매달리고 지켜내야 대한민국이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헌법 1조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천명하고 있습니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이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그게 고집스럽게 2주간 자신이 버티어 온 이유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가치를 흔드는 걸까요?

민주공화국이라는 가치를 흔드는 이는 누구일까요?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 그리고 그 국회의원이 뽑은 원내대표를 대통령이 찍어 내쫓는 것이야말로 민주공화국 가치에 어긋난다는 뜻일까요?

이런 대통령의 잘못된 말 한마디에 자신을 내쫓으려 혈안이 된 동료 의원들의 행태가 민주공화국 가치에 어긋난다는 뜻일까요?

유승민 원내대표의 생각이 이런 것이라면, 상황은 심각해집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는 잘못된 것이고, 나아가 박근혜 정권은 민주공화국 정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대통령의 지시에 '노'라고 얘기하지 못한 김무성 대표를 비롯한 새누리당 의원들 다수가 민주공화국 가치를 스스로 저버렸다는 뜻입니다.

노회찬 전 공화당 의원은 오늘 새누리당 의총 모습을 북한의 장성택 처형과 비교했습니다.

지도자의 말 한마디에 최고인민회의장에서 보안요원들에 의해 끌려나온 뒤 총살당한 모습과 비슷하다는 겁니다.

독재 국가의 전형이라는 겁니다.

정말 대한민국 대통령과 집권 여당은 북한식 공포통치, 독재정치와 비슷한 걸까요?

생각해 볼 대목입니다.

▶ 인터뷰 : 유승민 / 새누리당 원내대표 (오늘 사퇴회견)
- "지난 2주간 제 미련한 고집이 법과 원칙, 정의를 구현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다면 저는 그 어떤 비난도 달게 받겠습니다. 지난 4월 국회 연설에서 '고통받는 국민의 편에 서서 용감한 개혁을 하겠다. 제가 꿈꾸는 따뜻한 보수, 정의로운 보수의 길로 가겠다. 진영을 넘어 미래를 향한 합의의 정치 하겠다.'라고 했던 약속도 아직 지키지 못했습니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앞으로도 자신이 믿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투사가 될 것임을 천명한 셈입니다.

그 상대가 대통령일지라도, 또 집권 여당의 힘있는 계파일지라도 지금 그 길을 가겠다고 선언한 겁니다.

어쩌면 유승민 원내대표는 새누리당을 탈당하거나, 아니면 이 사퇴의 변으로 인해 출당당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유승민 원내대표의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오늘 사과를 하지 않았습니다.

지난달 박 대통령이 진노한 뒤 박 대통령에게 사과했던 모습은 오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때는 왜 오늘처럼 당당하지 못했을까요?

왜 연꽃을 피우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왜 민주공화국 가치를 지키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때는 이런 거창한 명분을 떠올리지 못한 걸까요?

처음에는 이런 명분이 없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이 버틸 수 있는 명분을 스스로 찾아낸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오늘 유승민 원내대표의 이 말들은 모두 급조된 자신을 위한 변명에 불과할 겁니다.

유승민 원내대표의 진짜 속내가 무엇이었는지는 앞으로 유 원내대표의 행보에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2주 동안 한 사람에게 국민이 놀아난 것을 본 것인지, 아니면 민주공화국 가치를 지키기 위한 외로운 투쟁을 본 것인지 그 판단은 조금 유보해야 할 듯합니다.

하지만 교과서와 법전에서나 존재하는 '민주공화국'이라는 가치의 의미를 다시 일깨워준 것은 분명 고마운 일입니다.

지금 우리는 민주공화국에서 살고 있는 걸까요?

김형오의 시사 엿보기였습니다.
[김형오 기자 / hokim@mbn.co.kr]
영상편집 : 신민희 PD, 이가영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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