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조선 왕실의 여인들…그들의 흔적을 보다
입력 2015-07-06 16:09  | 수정 2015-07-06 16:11

조선 26대 임금인 고종은 도저히 왕이 될 수 없는 신분을 타고났다. 고종은 조선 16대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9대손으로 그의 고조부와 증조부는 평생 평민으로 살았다. 조부인 이채중(후일 이구로 개명)이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신군의 봉사손으로 입적되면서 남연군에 봉해졌지만 껍데기뿐인 왕족이었다. 그런 고종을 아들로 삼아 왕좌를 물려준 인물이 헌종의 모친 조대비(신정왕후)였다. 남편이 요절해 왕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조선말기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 여걸로 불린 여인이다. 고종은 1868년 새로 지은 경복궁에서 최고 은인인 그녀를 위해 탄신 60주년 잔치를 성대하게 마련한다. 이 장면을 병풍에 담았는데 바로 ‘무진진찬도병(戊辰進饌圖屛)이다. 미국 LA카운티미술관(LACMA) 소장품으로 2005년 그 존재가 처음 확인됐다. 이 병풍이 우리나라를 찾는다.
국립고궁박물관이 개관 10주년을 맞아 조선 왕실의 여성을 조명하는 특별전 ‘오백년 역사를 지켜온 조선의 왕비와 후궁에서 병풍을 볼 수 있다. 7일부터 8월30일까지 계속되는 전시는 그동안 부정적이고 과장된 이미지에 가려 주목받지 못했던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의 삶과 생활상을 살펴보기 위해 준비됐다. 무진진찬도병과 함께 LACMA가 갖고 있는 작품인 ‘오백나한도(五百羅漢圖)도 이번 특별전에서 공개된다.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생모로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문정왕후가 발원한 불화다.
조선 임금은 태조부터 순종 황제까지 총 27명이다. 왕비는 계비를 포함해 45명이며 후궁 숫자는 왕비의 세 배에 이르는 130명 정도였다. 왕비는 반가 여식이지만 후궁은 양반은 물론 중인, 노비, 과부까지 신분이 실로 다양했다.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은 평생 한 남자만을 바라보며 사는 구중궁궐의 외로운 여인들로 종종 묘사된다. 왕의 총애를 믿고 권세를 부리고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격렬한 질투를 벌이는 이미지도 떠올려진다. 그들의 실제 삶은 어땠을까.
조선 왕비는 내명부 수장으로 아들을 낳아 왕위를 잇게 하고 왕이 붕어해 나이가 어린 세자가 즉위하면 수렴청정을 하기도 했다. 왕비와 세자빈, 후궁은 왕실 내의 엄격한 위계질서 아래 있었으며 지위와 역할은 물론 의복과 음식도 달랐다.

전시에서는 옷감의 색상으로 왕실 여성의 서열을 보여주는 황원삼, 홍원삼, 녹원삼과 왕비와 세손빈이 사용한 인장, 혼례 잔치에 쓰인 돗자리인 교배석과 동자상 등 유물 300여점이 선보인다. 이를 통해 간택된 사대부가의 여성이 왕비가 되는 과정, 왕실 여성이 받아야 했던 교육, 대통을 잇는 출산, 왕비가 누에를 치는 의식인 친잠례, 왕비와 후궁의 장례 등을 살펴본다.
나아가 왕실 여성의 문예활동, 신앙생활, 경제생활 등을 알아보고 ‘계축일기, ‘한중록, ‘인현왕후전 등 문학 작품으로 여성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특히 왕을 낳은 후궁 7명을 모신 사당인 칠궁 가운데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 씨의 신위가 있는 육상궁(毓祥宮) 감실이 재현된다. 효성이 지극했던 영조는 생모의 사당을 궁으로 승격시켰고 어머니를 받들기 위해 자신의 어진까지 걸었다. 서울 궁정동에 있는 칠궁은 평소 자유롭게 둘러볼 수 없는 곳이다. 오는 23일과 8월 13일에는 박물관 별관 강당에서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의 위상과 변천, 궁중문학 등을 주제로 특별 강연회도 펼쳐진다.
[배한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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