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아르헨티나서 거장 된 한국 여성 조각가 김윤신
입력 2015-06-25 15:28 

기어이 결혼 대신 프랑스 유학을 선택하려거든 이거 하나 약속해라. 유학비를 대줄 테니 나중에 조카에게 부담을 줘서는 안 된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955년이었다. 독립 투사 출신의 오빠(김국주 전 광복회 회장)는 막내 여동생의 유학은 허락했지만 냉정한 단서를 내걸었다. 여동생은 흔쾌히 그러겠다”며 가방을 쌌다. 홍익대 출신의 1세대 여성 조각가 김윤신(80) 이야기다.
그는 5년간 파리국립미술학교에서 유학한 뒤 상명대 조소학과 교수를 역임하며 안정적인 삶을 사는 듯했다. 그러다 1983년 12월 5일 쉰줄에 접어든 그에게 또다른 선택이 기다리고 있었다. 방학 때 무작정 떠난 여행지인 아르헨티나에서 ‘평생의 재료인 나무를 만나 사랑에 빠진 것이다. 1970년대 적송과 같은 나무로 작업하던 그에게 풍부한 목재와 광활한 초원이 있는 아르헨티나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표를 수리하지 않을 테니 빨리 돌아오라”는 대학 측의 채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그곳에서 작업을 계속했다. 수중에 단돈 100달러 밖에 없었지만 두려움도 없었다. 고국에 다시 온 것은 그로부터 4년 뒤 서울 진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기 위해서였다.
올해 팔순, 그러니까 지구 끝에서 정착한 지 30년을 맞은 그가 오랜만에 다시 돌아와 회고전을 연다. 서울 서초구 한원미술관에서 열리는 회고전 ‘영혼의 노래, 김윤신 화업 60년전이다. 청바지 차림의 작가는 서서히 말문을 열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풍요의 나라였어요. 사람들도 자유롭고 여유가 있었지요. 한국에서 보기 힘든 귀한 돌과 다양한 나무 재료를 보니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요.”
전시장에 나와 있는 조각과 회화, 설치 70여점은 아프리카 원시 미술처럼 스케일이 크고 투박한 듯 보이지만 자연의 섬세한 숨결이 배어 있는 듯하다. 인간의 염원을 담은 듯 하나하나 쌓아 올리는 듯한 형상을 지니고 있거나 못을 쓰지 않고 나무가 끼워 맞춰진 형태를 하고 있다.
‘염원과 ‘기원은 그가 즐겨 쓰는 작품 주제다. 어머니는 외아들인 오빠가 객지에서 무사하기를 늘 기원하셨습니다. 돌을 주워다 쌓거나 뒷산 샘물에서 길어온 정안수 앞에서 새벽 촛불 정성을 들이는 모습을 보고 자랐어요.”
그는 무념무상의 단계에서 작품과 합일되는 순간을 추구한다. 작품명 ‘합이합일(合二合一), ‘분이분일(分二分一)‘처럼 삼라만상과도 합일을 꿈꾼다. 나무는 자르다보면 그 안에 무엇인가 뼈가 있고 혈관이 있고 생명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어요. 싱싱하게 살아있는 나무의 생명력을 끄집어내는 작업에 매력을 느끼지요.”
지금도 팔순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왕성한 창작력을 자랑한다. 젊은 남성이 운반하기에도 힘든 육중한 목재를 손수 옮기고 전기톱 등 다양한 공구를 이용해 조각한다. 이야기 중 그가 돌연 나는 엄청난 부자”라고 말했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마음이 자유롭기 때문”이란다. 8·15 광복, 한국전쟁 등 험한 세상을 거치다 보니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한 정신을 갖게 됐어요. 정신의 세계, 정신의 힘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지금도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어요.”
그의 삶에서 예술은 늘 1순위였다. 사람의 염원을 예술로 승화시키려니 자연스레 영적인 것과 연결돼요. 결국 예술이란 영혼에 관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입니다.”
요즘에도 눈뜨면 오로지 작업장에 달려간다는 작가는 1990년 현대화랑, 2005년 박여숙화랑에서 전시를 열곤 했지만 2008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김윤신 미술관‘을 설립한 뒤 한국 전시가 뜸했다. 국내 전시는 8년만이다. 국내에는 덜 알려져 있지만 아르헨티나에서는 이미 유명 인사다. 프란치스코 교황을 배출한 부에노스아이레스대성당에 매주 미사를 가는 그는 ‘교황의 20년 지기인 문한림 주교와도 친분이 두텁다. 문 주교는 이번에 발간된 화집 축사를 써주기도 했다. 2010년 김윤신미술관 기획전에 당시 훌리오 코보스 아르헨티나 부통령이 방문해 화제가 됐다. 전시는 7월 8일까지. (02)588-5642.
[이향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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