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후성유전학 A to Z…난치병 치료 단서 풀리나
입력 2015-03-27 13:18  | 수정 2015-03-27 13:18

김영준 연세대 생화학과 교수(53)는 뭔가를 먹거나 특정 환경에 노출되는 것으로 인해 형질(생명체 특성)이 바뀌면 최소 2~3세대 정도는 전달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상대적으로 역사가 짧은 후성유전학 연구를 국내에서 일찍 시작한 전문가로 꼽힌다.
김 교수는 후성유전학은 특정 형질을 결정하는 DNA 정보와 상관 없이 환경에 의해 얻은 형질이 유전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같은 유전정보를 가진 일란성 쌍둥이더라도 각각 다른 환경에 노출돼 자란다면 서로 다른 특징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 그 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기근을 겪은 네덜란드 산모들 일부가 영양결핍에 시달렸고 이들이 출산한 자녀들 건강상태가 정상 산모가 낳은 아이들에 비해 좋지 않았다는 사례도 후성유전학과 관련된 연구다.
학계 일각에서는 후성유전학이 사라졌던 용불용설을 다시 살려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1세대가 얻은 특성·형질이 2~3세대까지 전달된다는 것을 보면 얼핏 진화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특성이 전달된다는 것을 진화로 볼 수 있겠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진화라고 보기 어렵다”며 후성유전학은 진화보다는 발달, 발생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진화는 엄밀한 면에서 후성유전학 변두리로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후성유전학은 아직 태동기인 학문이라 국내에서는 생소하지만 의학 분야를 중심으로 최근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며 특히 암의 발생 원인을 파악하는 데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했다. 그는 유전학 연구에선 유전자 손상이 주된 관심사지만 후성유전학은 특정 환경에서 어떤 성질이 발현될 수 있는지 여부가 이슈”라며 돌연변이가 아닌 정상 유전자도 특정 기능이 발휘되지 못하면 암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후성유전학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275년 전인 174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분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칼 린네가 ‘좁은잎해란초라는 식물을 대를 이어 관찰하다가 꽃 모양이 다른 개체를 발견했다. 당황한 그는 꽃 모양이 다른 좁은잎해란초에 ‘페롤리아(그리스어로 괴물이라는 뜻)라는 이름을 붙였다. 원인이 밝혀진 것은 259년 뒤인 1999년. 영국 연구진이 페롤리아 꽃 구조를 담당하는 유전자에 화학변화가 일어난 것을 발견했다. DNA 염기서열에는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이 유전자에 탄소 1개와 수소 3개로 이루어진 ‘메틸이 붙어 제대로 된 꽃 모양이 발현되지 않았던 것이다.
현재 과학자들은 후성유전학이 일어나는 메커니즘을 크게 ‘DNA 메틸화, ‘히스톤 단백질 변형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DNA 메틸화란 좁은잎해란초에서 발견된 것처럼 메틸이 특정 염기서열에 붙어 단백질이 발현되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모든 생물은 DNA가 단백질을 만들어 내면서 특정한 형질이 나타나는데 특정 세대에서 메틸이 붙으면서 형질이 나타나지 않거나 과발현되는 것이다. 김용성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유전체연구소장은 DNA에 메틸이 붙으면 DNA가 활동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히스톤 단백질은 DNA가 실처럼 묶여있는 ‘실타래와 같은 역할을 한다. 히스톤 단백질에 메틸과 같은 분자들이 엉겨 붙으면 모양이 변하면서 DNA의 유전 방식이 달라지게 된다. 이 외에도 최근에는 miRNA(마이크로RNA)도 원인으로 주목받고 있다. 짧은 RNA를 뜻하는 miRNA는 흡연자와 비흡연자에게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서로 다르게 발현된 miRNA가 DNA에 달라붙어 유전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후성유전학이 주목받는 이유는 또 있다. 암과 같은 여러 질병들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밝혀지면서다. 암은 세포에서 돌연변이가 발생하는 것이 원인이 되는데 DNA 염기 서열이 문제가 아니라 후성유전학적으로 메틸로 인해 특정 유전자가 과발현됐을 때 나타날 수 있다. 김용성 소장은 돌연변이는 인간이 고칠 수 없는 만큼 회복되지 않지만 메틸이라는 것은 유전자에 붙었다가 떨어질 수 있는 것”이라며 따라서 후성유전학은 그동안 어쩔 수 없다고 여겼던 여러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유전자 운명론에 갇혀있던 인간의 질병을 연구와 노력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공해 주는 만큼 후성유전학은 매력적 학문임에 틀림없다.
[원호섭 기자 / 이영욱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MBN APP 다운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