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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조선의 엔터테이너⑩] 가난속에서 노래로 행복을 전파했던 김수장
입력 2014-05-21 15:43 
해동가요 / 김수장 편 김삼불 교주 /정음사 / 사진 제공=노마드북
[MBN스타] 노가재는 해동가요를 쓴 김수장의 호이자 김성기의 경정산가단과 쌍벽을 이루는 조선 후기 가단의 이름이기도 하다. 18세기는 여항문화(閭巷文化)가 꽃피운 시기다. 여항은 일반 백성이 사는 골목길을 뜻한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상인을 비롯한 중인 계층이 성장하면서 이들이 중심이 된 새로운 형태의 문화가 발달했다.

김수장 역시 병조에서 서리로 일했다는 기록으로 봐서는 중인신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꽃을 비롯한 자연을 노래하고 남녀 간의 사랑을 주제로 하는 노래를 지었으며 많은 가객과 활발한 교류를 했던 인물이다.

그는 영조 36년인 서기 1760년, 71세가 되던 해에 한양의 화개동에 자그마한 초가집을 짓고 동료와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경정산가단과 쌍벽을 이루는 가객집단인 노가재가단이 탄생한 순간이다. 김우규와 박문욱 같은 당대 최고의 가객들이 모였다. 노가재에 모인 가객들은 시인이 지은 시에 운율을 맞춰서 노래를 부르고 연주자들이 악기로 받쳐 주었다. 점잖은 양반들이라면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을 방식이었지만 여항의 예술인들은 관습과 규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노래하고 연주했다. 그를 중심으로 한 노가재가단은 김천택과 김성기가 활동하는 경정산가단과 함께 한양의 가곡문화를 이끌어갔다는 평가를 받았다. 경정산가단이 엄격하고 격식을 중시했다면 노가재가단은 자유로운 분위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젊은 가객들이 선배들로부터 꾸준하게 교육을 받음으로써 솜씨가 늘어났고, 또래와의 교류를 통해 풍성한 가곡들을 만들어냈다.

1763년, 김수장은 해동가요라는 가곡집을 펴냈고, 죽을 때까지 계속 고쳐 쓴다. 그야말로 예술혼을 불태웠다고 할 수 있는데 책을 쓰고 계속 고친 것은 더 많은 사람이 노래를 부르기를 꿈꿨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해동가요의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대개 문장과 시는 책으로 만들어져서 천 년이 넘도록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가요는 불리는 순간에는 찬사를 받지만, 그때가 지나면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버리고 사라져버린다. 참으로 안타깝고 아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려 말부터 지금까지 여러 임금님과 관리들, 선비와 가객, 백성과 어부, 기생들은 물론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이가 지은 노래들을 수집해서 책을 펴내면서 해동가요라고 이름 지었다. 부디 여기 적혀 있는 노래들이 오랫동안 전해지기를 바란다.”

그는 노래가 지닌 풍부한 감성을 사랑하는 동시에 그것이 쉽게 사라진다는 점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늙은 나이에 손수 붓을 든 것이다. 노가재가단이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을 기울인 것도 아마 이런 뜻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리라.

우리는 삶이 풍요롭고 행복하기를 바란다. 예술은 돈이나 물질로 채울 수 없는 부분을 채워준다. 건 카타가 등장하는 ‘이퀄리브리엄의 세상은 매우 삭막하다. 문화와 예술이 모두 탄압받고 종적을 감췄기 때문이다. 조선이라는 나라에서는 문화와 예술이 뿌리내리기 어렵다. 지배층들이 예술가들을 천한 자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평생 노래를 해서 수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줬던 김수장조차 늘그막에 작은 초가집에서 살아야 했고, 가족들은 굶주림을 밥 먹듯이 했다고 전해진다. 배고픔에서 예술이 나온다고는 하지만 정당한 대가를 주지 않는 상황은 당사자를 힘들게 하기 마련이다. 조선의 예술가들을 보면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본인과 가족 모두 굶주림과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것들이 불타는 예술혼을 꺾지는 못했겠지만 말이다.

김수장 역시 평생을 가난과 배고픔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가 지은 해동가요는 몇 가지 판본으로 만들어지면서 오늘날까지 전해져온다.

정명섭(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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