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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그랬지] 이호준, 겉과 속이 다른 상남자
입력 2014-01-17 08:10  | 수정 2014-01-17 16:24
이호준은 초등학겨 5학년 때 전학을 결심하며 야구를 시작했다. 사진=김영구 기자
[매경닷컴 MK스포츠 표권향 기자] 타석에 들어선 이호준(38·NC 다이노스)이 뿜어내는 카리스마는 상대 투수를 움찔하게 한다. 하지만 그라운드 밖에서는 정반대의 이미지로 선수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
이호준은 겉으로 보여 지는 이미지와 달리 웃음이 많은 선수다. 동료들과 대화를 즐기고 후배들에게 필요한 야구용품을 제공해주는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다.
실력면에서도 리그 정상의 타자 중 한 명이다. 거포 이호준은 호쾌한 타격감으로 줄곧 4번 타자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런데 투수로서 프로데뷔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가 있을까?
올해로 프로데뷔 21번째 시즌을 맞는 이호준은 그가 지켜온 야구 절칙을 밑바탕으로 막내구단을 이끌고 있다. 그가 걸어온 야구인생을 들어보자.
▲ ‘어머니와 500원 첫 번째 고비를 넘기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이호준은 동네야구를 즐겼다. 체육시간마다 야구를 시켰던 담임선생님은 그의 재능을 발견하고 야구부에 가입할 것을 권유했다. 경찰관이었던 아버지의 반대가 있었지만 어머니의 적극적인 설득으로 광주 중앙초등학교로 전학했다.
다른 선수들보다 늦은 시기에 야구를 시작했지만, 이호준은 4번 타자 겸 투수로서 활약했다. 이호준은 홈런은 치지 못했지만, 당연히 내 역할이라고 생각했다”라며 그때부터 에이스로서의 본능을 가지고 있었던 자신감을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어린 이호준에게 야구의 세계는 고됐다. 야구를 시작한지 열흘째 되던 날 어머니에게 야구를 그만 두겠다”라며 불만을 털어놨다. 이호준은 치고 던지고 받는 것이 야구인 줄 알았다. 그런데 작전과 기술 뿐 아니라 내가 이겨내야 할 부분이 더 많았다”라고 말했다.
야구인생에서 첫 번째 고비를 맞았던 이호준을 설득시킨 건 어머니였다. 이호준이 야구하는 것을 반대했던 아버지의 마음까지 돌렸던 어머니다. 방법은 간단했다. 어머니가 야구하라고 500원을 줬다. 다시 운동장으로 달려가 야구를 했고, 늦게 시작해서인지 금방 6학년이 됐다”라며 웃었다.
이호준은 1994년 해태 타이거즈에 투수로서 입단했지만, 이후 타자로 전향해 지금의 4번 타자가 됐다. 사진=김영구 기자

▲ ‘투수에서 타자로 인생이 바뀌다
1994년 이호준은 우여곡절끝에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다. 연세대와 해태의 그야말로 피튀기는 스카우트 경쟁이 있었다. 당시 그가 투수로 지명됐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데뷔 첫 해 1군 8경기에 등판해 무승무패. 평균자책점 10.22로 부진했다. 2군에서 전전하며 방황했다. 이때 이호준을 도와준 이가 바로 이순철 해설위원이다.
이순철 선배가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 야구부 감독님과 동기였다. 하루는 나를 불러 ‘타자하면 마음을 잡고 야구할 자신 있느냐라고 물었다. 나는 ‘네라고 대답했다. 선수가 감독과 코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힘들지만 고참 선수로서 나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찾아가 제안했다”라며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당시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할 때 주변에 잡음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 2군 감독이었던 김성근 감독 역시 투수로서의 성장을 더 바랐기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타자가 된 것은 잘 한 일이라고 말한다. 이호준은 지금도 김재현은 나에게 ‘내가 너 야구선수 만들어준 거야. 그때 내게 홈런 맞고 잘 먹고 잘 사는 거야라고 말한다. 당시 김재현은 19홈런을 기록하고 있었고 나는 그의 타구에 20홈런을 채워줬다. 내 1군 마지막 마운드였으며 김재현이 신인 최초로 20홈런을 달성하는 경기였다”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한 이호준은 현재 리그를 대표하는 4번 타자로서 팀을 이끌고 있다. 사진=김재현 기자

▲ 숫자 ‘4와 동반인생
2000년 6월 1일 이호준은 언더핸드 투수 성영재와 트레이드돼 SK 와이번스로 둥지를 옮겼다. 이호준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해태에 계속 있었으면 주전으로 뛸 수 있는 확률이 없었을 것이다. 트레이드 소식을 들었을 때 신생팀에 가면 잘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붙었다. 섭섭할지 모르겠지만 만세를 부르며 갔다”라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트레이드 자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이호준은 2~3일 지나니깐 해태가 그리워졌다. 정이 든 것이다. 하지만 어느 곳에 가든 야구하는 건 똑같다. 또 선수들도 계속 볼 수 있고 좋은 선배들 아래에서 많이 배울 수 있어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SK에서 야구인생의 제 2막이 열렸다. 2002년부터 4년 연속 20홈런 이상을 기록하며 팀의 중심타자로서 자리매김하는데 성공했다. 2004년에는 타율 2할8푼 30홈런 112타점으로 타점왕을 차지했다.
이호준은 처음 야구를 시작할 때 어머니가 사주팔자를 보고 왔는데, 내 사주에 역마살이 끼어서 ‘공부하는 것보다 운동을 하는 것이 좋다라고 말했다. 야구의 ‘야자도 모르는 할아버지였는데 내게 ‘숫자 ‘4를 계속 달고 야구를 할 것이다‘라고 했다”라며 지금까지 프로에서 4번 타자를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신기해했다.
이호준은 아내 홍연실 씨의 내조로 야구에만 전념할 수 있다라고 자랑했다. 사진=김영구 기자

▲ 눈물 젖은 분유와 기저귀
2001년 첫 째 동훈이가 태어났다. 아버지가 된 이호준은 선배들에게 이것저것 정보를 얻어 아들에게 좋은 것만 해주고 싶었다.
아내에게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자녀를 둔 선배들이 추천해준 분유와 기저귀를 이야기했다. 아내의 표정이 안 좋았다. 아내는 가격이 10배 차이에 양도 5배로 차이가 난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기저귀 값이 비싸 삶아가면서 천 기저귀를 쓰고 있었다고 했다. 그때 충격으로 이를 악 물고 야구만 했다”라고 전했다.
아내 홍연실 씨는 이호준의 든든한 버팀목이다. 이호준은 나보다 강한 사람”이라며 엄지를 치켜 올렸다.
2012년 아내에게 은퇴 의사를 밝혔다. 아내는 내 의사를 존중해줬다. 그리고 일단 할 수 있을 때까지 최선을 다하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때부터 내가 이런저런 핑계만 늘었었나보다”라며 하루는 아내가 ‘오빠가 제일 싫어하는 스타일로 야구를 하고 있어. 뭐만 하면 핑개를 대는데, 이건 오빠 모습이 아니야라고 꼬집었다. 정신이 바짝 들더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3자녀를 키우면서 집안일까지 척척해내는 아내를 자랑스러워했다. 이호준은 결혼할 때 힘들게 운동하고 왔는데 반찬이 부실하면 서글플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지금까지 우리 집 밥상은 거의 한정식 식당과 같다”라며 자랑했다.
이호준은 2014시즌 선수들에게 자만하지 말고 묵묵하게 강해지라고 강조했다. 사진=김영구 기자

▲ ‘공룡군단을 이끄는 카리스마
2012시즌이 끝난 후 두 번째 자유계약선수(FA) 신분을 얻었다.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는 자리이기에 가장 화려하면서도 쓸쓸한 시기다. 이호준은 원 소속팀 SK를 떠나 NC로 이적했다.
이호준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 팀을 떠나게 된 첫 번째 이유다. 갈등이 심해 은퇴도 생각했었다”라고 털어놨다. 이때 이호준에게 손을 내민 구단이 NC였다. 전화로 첫 마디가 ‘이호준이 꼭 필요하다. 우린 이호준을 높게 평가 한다였다. 그 말을 듣고 바로 NC행을 결정했다”라며 첫 번째 해태에서는 내 의사 없이 트레이됐지만, 두 번째 팀을 이적할 때는 내 뜻대로 옮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호준은 1군을 처음 접하는 NC의 활력소가 됐다. 특유의 카리스마와 재치를 발휘해 어린 선수들을 이끌어 2013년 예상판도를 깨고 7위를 기록했다.
그만의 철칙이 있다. 첫 번째는 전력질주, 두 번째는 서로 격려하자, 마지막은 유니폼을 입고 있을 땐 절대 불평하지 말자다. 이호준은 동료가 실수했을 때 그 선수의 탓을 하며 무조건 벌금이다. 실수를 하더라도 다음에 잘 할 수 있을 것이란 사인을 계속 보내라고 했다. 또 유니폼을 입고 있을 땐 무조건 감독-코칭스태프에게 복종이다”라고 강조했다.

프로생활 20년에서 경험한 노하우였다. 이호준은 우승하는 팀에는 불만이 없다. 선수들 안에서 똘똘 뭉친다. 감독-프런트-선수 3박자가 맞아야 우승전력을 키울 수 있다. 이는 좋은 팀이 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SK 주장이었을 때 이호준은 ‘멘붕클럽을 만들어 선수들과 시간을 가졌다. NC에서도 젊은 선수들과 지속적으로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이호준은 지금 내 식대로 끌고 갈 수 있다. 하지만 후배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선배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20살과 40살의 대화에서는 분명 세대차이가 있다. 그 중간에서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라며 팀이 잘 돌아가기 위해 무조건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것보다 회의를 통해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 올바른 것 같다. 그들에게도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라며 NC가 성장할 수 있는 분위기에 대해 설명했다.
[gioia@mae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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