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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Mr. 전설] 류중일, ‘그에게 숨겨진 우승 DNA’
입력 2013-10-24 06:04 
류중일이 전국무대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건 경북고 2학년 때인 1981년이었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유난히 앳돼 보이는 얼굴이 젖비린내가 가시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체구에 비해서 긴 팔과 빨랫줄 같은 강한 송구를 보고나면 야구에 문외한이라도 ‘재목감임을 짐작할 수 있는 선수였다.
그의 성격을 두 단어로 요약하자면 ‘긍정과 ‘자신감이다. 류중일 만큼 낙천적인 선수도 없었던 것 같다. 방망이가 안 맞을 땐 내가 원래 타격은 약해요”라고 웃어 넘겼고, 어쩌다 큰 실수를 하면 나 때문에 졌으니까 다음엔 나 때문에 이겨야지요”라고 대수롭지 않게 받아 쳤다.
유격수로는 치명적인 팔꿈치 수술을 할 때조차 선수생활 하다보면 이럴 때도 있는 거죠”라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 도대체 저 친구 속엔 어떤 DNA가 들어있나”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1999시즌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으면서 그는 코치가 아닌 구단직원으로 갈 뻔 했다. 당시 구단 고위층에서 스카우트로 보내려 했다. 프랜차이즈 스타를 은퇴 뒤 곧바로 스카우트로 쓰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반대여론이 들끓자 없던 일이 됐다. 이때도 정작 류중일 자신은 스카우트로 새 일을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라며 무덤덤해 했다.

그는 2010년 말 친정팀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이 됐다. 1987년 삼성 유니폼을 입은 이후 줄곧 한 팀에서만 선수, 코치에 이어 감독까지 올라갔다. 장효조 김시진 이만수 김성래 등 숱한 별들을 배출한 삼성에서 유일한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의 감독이 됐다.
류중일은 프로야구를 거쳐 간 수많은 다른 감독들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1980년대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닌 ‘386세대는 운동세계에서도 선배들과 달랐다. 류중일에게 때 묻은 권위주의 따윈 없었다. 선수들과 똑 같은 눈높이에서 그들을 바라봤고, 솔직함으로 다가갔다.
그에겐 다른 감독에게 없는 빼어난 통찰력이 있다. 모든 사안을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 때문에 팀 전력을 냉정할 만큼 가감 없이 꿰뚫어 본다. 어떻게 해야 현재의 전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런 자신의 생각을 언론을 통해 솔직하게 전달한다.
일부 삼성 극성팬들은 이런 류중일에게 돌멩이를 던진다. 변화와 모험을 두려워하는 ‘기득권 야구라고 비난한다. 선수 이름값만으로 야구를 한다면서 그를 ‘관중일이라고 비아냥댄다. 최강팀 감독에 걸 맞는 포스가 없다고 꼬집기도 한다.
하지만 류중일은 자신만의 색깔로 페넌트레이스 3년 연속 1위란 금자탑을 쌓았다. 김응용 김성근 김재박도 못한 프로야구 32년 최초의 기록이다.
특히 2013시즌 1위는 사뭇 의미가 크다. ‘국민 머슴 정현욱이 FA로 팀을 떠났고, 권오준은 부상으로 일찌감치 전열에서 이탈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 해 25승을 합작한 외국인 투수가 올해는 10승에 그쳤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시즌 막판 기적 같은 8연승을 이끌면서 기어코 1위에 오른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뉴욕 양키스와 브루클린 다저스 감독을 역임한 레오 듀로셔는 사람 좋으면 꼴찌”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성적도 못 내면서 사람만 좋은 감독을 프로세계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까.
포기할 줄 모르는 끝없는 ‘긍정 마인드. 여기에 때를 기다리는 ‘인내력. 예전부터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소신이 분명했던 류중일이다.
[매경닷컴 MK스포츠 김대호 편집국장 mksports@maekyung.com]
사진제공=장원우 전 주간야구 사진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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