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안녕! Mr. 전설] ‘기인’ 김동엽, “내가 죽거든 관 속에…”
입력 2013-08-26 06:04 
1997년 4월 10일, 서울 한남동 월세 35만 원짜리 원룸에서 변사체가 발견됐다. 시신의 상태로 볼 때 사망한 지 4~5일은 지난 것으로 추정됐다.
야구계의 ‘기인, 아니 대한민국 최고의 ‘골통 김동엽은 이렇게 쓸쓸히 이 세상을 떠났다.
경기장에 들어가기 전 이벤트를 먼저 생각했던 사람. 날마다 새로운 어필 방식을 구상하고 운동장에 섰던 사람. 심판에게 항의하다 야구장 한 가운데 드러누운 사람. 온갖 구설에 올랐지만 구구한 변명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
이런 김동엽을 가리켜 누군가는 그는 한국에서 유일한 프로”라고 평했다.

김동엽은 엉덩이를 빵빵하게 보이기 위해 일부러 유니폼 뒷주머니에 장갑을 두툼하게 넣고 다녔다. 관중석에서 아유가 터져 나온다. 야, 김동엽~~. 엉덩이 좀 집어넣어.” 김동엽은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고개를 획 돌리고 삿대질을 한다. 야, 뭐이가 어드래?” 그리곤 관중과 말씨름을 한다.
황해도 사리원 출신으로 한국전쟁 때 남하해 자신을 ‘38 따라지라고 불렀다. 감독 생활 내내 등번호 ‘38을 버린 적이 없다.
1976년 아마추어 롯데 자이언츠 창단 감독을 맡은 김동엽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구보를 했다. 선수들 사이에서 아우성이 터져 나왔지만 김동엽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리고 한국 실업팀으론 최초로 일본 롯데 오리온스(지바 롯데 마린스 전신)와 합동훈련을 했다. 1976년 신생팀 롯데는 실업야구를 평정했다. 당시 롯데 멤버였던 정현발(재능대학 감독)은 그때 롯데 내야 포메이션은 아마추어 경지를 넘었다. 김동엽 감독님의 야구식견과 통찰력은 대단했다”고 회고했다.
김동엽은 우승 보너스 문제를 놓고 신경전을 벌였다. 롯데 측에서 그 많은 돈을 주려면 우리 여공들이 얼마나 고생을 해야 하는데…”라고 하자 그럼 여공들 데려다 야구시켜라”라는 말을 내뱉고 사표를 던졌다.
이렇게 감독을 그만 둔 게 모두 13번. 그의 자서전 제목이 <그래, 짤라라 짤라>다.
1982년 해태 타이거즈 초대 감독에 부임했지만 13경기, 한 달 만에 코치들과의 불화로 그만뒀다. 1983년 MBC 청룡 감독을 맡아 후기리그 우승에 이어 한국시리즈에 올랐지만 ‘보너스 파문으로 해태에 1무4패로 졌다. 물론 감독에서 잘렸다.
1986년 다시 MBC 감독에 올라 한 팀에서 두 번 감독을 한 기록을 세웠다. 이때도 일본인 미즈다니 투수코치와의 마찰로 1년 만에 물러났다.
술을 사랑했던 김동엽은 특히 소주에 레몬을 짜서 만든 ‘레몬소주를 즐겨 마셨다. 앉은 자리에서 소주 10병은 눈 깜짝할 사이에 없앴다.
야구계를 향한 ‘독설로도 유명한데 조목조목 짚어내는 그 내용이 매우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어서 주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한양대 감독 수락 조건으로 대학원 진학을 내걸었을 정도로 학구적이었다.
말년은 불행했다. 부인과 이혼하고 자식들과도 떨어져 살았다. 경제적으로 너무 궁핍해 야구후배들의 도움을 받으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 갔다.
내가 죽거든 관속에 화투 한 모만 넣어 달라”고 했던 김동엽. 그의 빈소는 야구 후배들도, 평소 그 많던 지인들도 거의 없이 적막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기인이 세상을 떠난 지 16년이 넘게 지났다.
[매경닷컴 MK스포츠 김대호 기자 dhkim@maekyung.com]
사진제공=장원우 전 주간야구 사진부장


MBN APP 다운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