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왕 조용필(63)이 10년 만에 발표한 정규 19집 ‘헬로(Hello)가 음원차트 상위권에서 장기 집권 중이다. 앨범은 찍어내자마자 매진되고 있으며 유통사 측은 무난하게 10만 장 이상 판매될 것을 내다보고 있다. 미디어는 연일 ‘가왕의 귀환에 환호를 보내고 있고 대중들 역시 뜨거운 지지를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대중문화 콘텐츠가 근본적으로는 취향과 선택의 문제로 귀결된다면 조용필의 음악 역시 분명 호불호가 생겨야 마땅하다. 하지만 ‘조용필이 싫다고 말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 ‘바운스 ‘헬로 조용필의 창법에 넘치는 뽕끼
먼저 19집이 공개된 순간부터 쏟아진 조용필의 ‘의외로 젊은 음악에 대한 일부의 비판적 시선은 단순히 ‘기성 팬들에 대한 배신이라는 차원에서 언급됐을 뿐 음악 자체에 대한 논의는 많지 않았다.
실제로 조용필의 노래가 들려주는 사운드의 완성도는 믹싱, 마스터링을 포함한 레코딩 기술적 측면에서 근래 어떤 앨범보다 견고하다. 외국 작곡가의 곡인 만큼 멜로디의 전개 역시 지극히 팝스럽고 세련됐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현재 가장 큰 사랑을 받고 있는 ‘헬로와 ‘바운스에서 조용필이 들려주는 창법은 소위 ‘뽕끼가 넘친다. 실제로 조용필은 기존 팬들을 철저히 배신한 건 아닌 셈이다. ‘헬로와 ‘바운스의 전형적인 2013년형 모던록 사운드가 40~50대 팬들이 듣기에 전혀 부담이 없는 건 이 같은 조용필의 창법에서 기인한다. 지극히 세련된 사운드와 창법에서 오는 이질감은 분명 호불호가 갈릴 만하다. 이 같은 창법의 선택은 ‘충전이 필요해 ‘그리운 것은 등 수록곡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다분히 올드하다고 느껴지는 이 같은 창법에 대해 쉽게 ‘조용필의 한계라고 비판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다른 수록곡에서는 이 같은 방식으로 부르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널 만나면 ‘설렘 등의 노래에서는 소위 뽕끼를 철저하게 거세하고 노래를 부른다는 점이다. 결국, 못해서가 아니라 하지 않은 것뿐이고, 그의 창법에 어떤 ‘의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저 비판보다는 감탄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 ‘63세 조용필이 부르는 소년 감성
조용필의 이번 앨범이 ‘젊다고 설명되는 건 비단 음악 때문이 아니다. ‘바운스는 첫눈에 사랑을 느낀 소년의 두근대는 심정을 표현한 곡이고, ‘헬로는 사랑에 빠진 소년의 주체할 수 없는 심정을 가사에 담았다.
10대, 20대에게 그의 목소리가 낯설 수 있지만, 30대 이상은 조용필의 목소리가 익숙하며 40~50대 이상은 조용필의 목소리가 친한 친구 이상으로 친숙한 세대다. 조용필의 목소리가 단순히 가수의 음성으로 인식될 수 없고 조용필 개인의 인생(혹은 청자의 인생)과 오버랩 되는 세대에게는 조용필이 부르는 소년감성은 어딘가 어색하게 들릴 수 있다.
조용필이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같은 노래에 호소력과 울림이 더 진하게 다가오는 것은 조용필과 조용필의 노래가 하나가 돼 전달되는 까닭이다. 실제로 이번 앨범에서 ‘걷고 싶다나 ‘어느 날 귀로에서 같은 노래에 큰 감동을 했다고 말하는 팬들이 있다는 것은 단순히 장르적인 선호도 때문은 아니다. 분명 가사에 그 핵심이 있다. 노래와 가수의 인생이 주는 대중들의 인식에 괴리감은 사실 가수에게 치명적이다. 이번 앨범에 자작곡이 한 곡밖에 없다는 지적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이 같은 지적조차도 조용필에게는 빗겨가는 중이다. 일정 부분 권위에 의지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보다 더 큰 의미는 조용필이 우리 대중문화에서 이미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음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조용필은 단순히 스타가 아니라 작품을 만드는 아티스트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대중들에게 인식시켰고, 그가 만드는 작품은 그의 개인적인 삶을 뛰어넘어 작품 그 자체로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있는 것.
◯ 조용필의 권위가 필요한 2013년 대중문화
조용필이 증명하고 대중들이 반응한 것은 순수한 아티스트에 대한 권위다. 이 같은 아티스트로서의 권위는 현재 우리 대중문화에 무엇보다 필요한 요소였다. 퍼포먼스와 비주얼 등이 만든 이미지가 음악을 압도하고 미디어를 통한 소위 언플과 해외에서의 인기가 역수입돼 부풀려지는 대중 가요계에 조용필의 행보는 ‘아티스트의 권위와 존경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되돌아보게 하는 대목이 됐다.
아티스트의 권위는 단순히 과거 그가 얼마나 잘나가고 대단했는가를 되새김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현시점을 기준으로 얼마나 새로운 것에 대해 도전하는지, 그 태도와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종종 ‘배신을 하기도 하는 것도 그 과정의 일부다.
실제 최근 가요계는 ‘대중들의 취향과 구미에 맞춤형 음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이 당연한 것처럼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아티스트는 대중을 따르는 존재가 아닌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 대중을 이끄는 존재라는 것을 조용필은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를 45년 동안 지치지 않고 증명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감동을 주는 것.
국내 가요사상 가장 뛰어난 보컬리스트자 걸출한 송라이터 중 한 사람이 내 한계를 넘고 싶어서 자작곡을 일부러 넣지 않았다”고 담담하게 고백하는 것은 그가 조용필이라는 자신의 이름 석 자에 얹힌 권위보다 음악을 더 위에 놓고 있다는 증거다.
조용필에게 ‘가왕이라는 자리에 앉히고 신성시하거나 무조건적인 찬양을 쏟아낼 이유는 없다. 조용필도 호불호가 갈릴 수 있으며 이를 인정할 필요도 있다. 하지만 그가 현재 존재하는 의미는 선명하고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가 ‘전설로 불리며 과거에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공룡이 아니라 현재진행형 아티스트고, 상품으로 취급되기 쉬운 대중음악이 어떻게 품격과 권위를 얻는지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라는 점이다. 우리 대중문화도 비틀즈나 롤링스톤즈 부럽지 않은 존경할만한 아티스트를 품고 있다. 그 사실은 비단 그의 음악을 즐기는 대중들의 자부심뿐 아니라 그의 뒤를 따르는 후배들에게도 큰 힘이 될 것이 분명하다.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이현우 기자 nobodyin@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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