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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루시드폴,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청명한 호수
입력 2013-04-02 08:07 

뮤지션 겸 작가 루시드폴(38)은 한 마디로 ‘조용한 파격이다. 어떤 파동도 없이 잔잔하고 맑은 호수 같지만 좀처럼 수심을 가늠할 수 없다. 조심스레 들여다보면 물 속 깊은 곳 어딘가엔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혹은 활화산처럼 뜨거운 감정이 숨어있는 듯도 하다.
정규 5집 앨범을 발매하고 크고 작은 공연은 물론, 방송 활동까지 열심히 달렸던 지난 2011년. 그는 전매특허인 ‘스위스 개그 하면 루시드폴을 곧바로 떠올릴 정도로 대중적 저변을 넓히는 데 성공했다.
천재라 해도 부족함이 없는 프로필(로잔연방공과대학대학원 생명공학 박사, 2007년 스위스 화학회 고분자과학부문 최우수논문발표상)과 결코 흐트러짐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미지의 루시드폴은 그 해 연말 콘서트를 깔끔하게 마친 뒤, 음악 활동에 잠시 쉼표(,)를 찍었다.
많은 일에 에너지를 쏟다 보니 음악적으로 많이 소진되는” 건 제아무리 슈퍼맨이라 해도 피할 수 없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작년 초, 4월 콜라보레이션 공연 준비를 하면서 처음으로 스트레스성 불면과 치주질환이 오더라고요. 잇몸이 부어 씹기도 어렵고 잠도 못 잤죠. 스트레스를 꽤 많이 받았는데, 아마도 제 생각엔 뭔가가 소진됐다는 느낌을 받은 것 같아요. 소진된 상태에서 새로운 무대를 꾸며야 한다는 부담감과 내적 고갈이 합쳐진 거죠.”
스스로에게 ‘안식기에 준하는 시간을 선물했음에도 불구, 마냥 쉴 줄 알았던 그는 어느 날 문득 펜을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자판 위에 손을 얹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평소 공식홈페이지 겸 개인 블로그인 ‘물고기마음에 일기를 써내려갔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갖가지 상상력이 동원된 이야기였다.
뚜벅뚜벅 써내려간 글은 지난 1월, 단편 소설집 ‘무국적요리로 완성됐다. 다만 야심차게 출간했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된 일”이었다.
공연까지 마친 뒤 사실 특별한 계획은 없었어요. 피아노, 보컬 레슨도 받고 ‘뭘 하고 지내지 하다 고민 끝에 시를 조금씩 쓰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소설이 쓰고 싶어지더라고요. 어떤 이야기들이 자꾸 생각났죠.”
브라질 음악가이자 작가인 시쿠 부아르키의 장편소설 ‘부다페스트 번역 작업을 하던 중 맺은 인연으로 탄생한 ‘무국적 요리. ‘탕 ‘똥 ‘행성이다 ‘싫어! 등 총 8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 책의 제목은 초고를 담아뒀던 폴더 이름이기도 하다.
‘무국적요리는 교토 여행을 갔을 때 우연히 간 식당의 이름인데, 자꾸 머리에 맴돌더군요. 솔직하고 자유로워 보였죠. 무언가 대책 없이 섞였다기보다는 아무런 정체성이 없다고 표현하는 게 좋을 것 같았어요.”
각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성별이나 지명, 국적, 시대, 역사적 배경은 최대한 탈색됐다. 여기가 어딘지 잘 알 수 없는, 현실 같기도 하고 비현실 같기도 한 공간, 옛날 이야기 같기도 하고 현재의 이야기 같기도 하게 느껴지게 썼어요. 이성적으로, 깊게 생각하고 결정한 건 아니었지만 직관적으로 내가 쓰려던 소설과 맞는다는 생각으로 쓴 것 같아요. 아무 생각 없는 듯 보이지만 그 밑에는 보이지 않는 고리가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책 속에는 기성 작가들과 차별화된 루시드폴만의 개성이 묻어나는 화법에, 허를 찌르는 강력한 반전이 숨어있다. 오랜 시간 서정적인 음악으로 대표돼 온 그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상당한 파격이다.
노래와 다르다는 얘기는 많이들 하세요.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보면, 노래로 만들어낼 수 있는 이야기들은 오히려 더 좁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게 더 답답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요. 가령 미선이(밴드) 때나 솔로로 활동할 때도 다르고, 그에 따라 그 안에 담고 싶은 이야기도 달라지는데, 어떻게 보면 음악적으로 제가 독특한 위치가 있겠지만, 또 그런 만큼 굉장히 좁거든요. 제 능력도 그렇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하는 가사나 이야기가 굉장히 한정적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사람이, 시쳇말로 밥만 먹고 살지 않잖아요. 생각이나 관심이나 표현하고 싶은 것들이 많을텐데, 그간 좁은 창만 있었던 거죠. 그 좁은 창에 어떻게든 끼워맞추려 하고 하다가, 산문이라는 다른 통로를 만나 더 즐겁고 재미있게 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해소가 된다 할까요.”
평소 섬세하기로 소문난 그는 단어 하나 선택할 때도 신중을 거듭한다. 타고난 재능에 노력이 더해지니, 과연 ‘음유시인이라 칭할 만 하다. 그는 긴 호흡의 글을 통해 가사의 한계를 뛰어 넘었다. 머리 속을 부유하는 무한 상상력을 표현할 수 있는 탁 트인 장(場)을 만난 듯 했다.
말도 못하죠(웃음). 예전에 3집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에 대해 한 지인이 ‘우리나라 가요에서 죄인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많이 쓰는 노래는 이 노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 얘길 들으니 기분이 너무 좋더라고요. 가사적인 터부(taboo)를 깨고 싶은 생각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되니 그것도 한계가 있더군요. (가사가) 노래에 묻어나야 되고, 곡의 무드를 깨면 안 되고. 5집 즈음 돼서 가장 고민이 됐던 건 라임의 문제였는데, 결국 가사를 쓸 땐 어쩔 수 없이 부수적인 입장에서 쓰게 되는 것 같아요.”
‘음유시인이라는 타이틀은 그에게 일말의 자극과 책임감도 주지만 ‘무국적요리를 펴낸 지금, 그는 작문에 있어 한결 자유로워진 느낌이다.
늘 많이 고민하며 씁니다. 하지만 어찌 됐든 소설을 쓰기 시작하길 잘 했단 생각이 드는 건, 노래 안에 내가 표현하고 싶은 걸 담겠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압박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이제 다른 통로도 있다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고요. 앞으로 어떤 가사와 어떤 형식의 음악이 나올 지 모르겠지만, 조금 더 과감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담백한 듯 강렬한 한 방이 숨어있는 ‘무국적요리로 반전 있는(!) 남자임을 입증한 루시드폴은 다시 기타 하나 들고 대중 앞에 선다. 2일부터 4월 한 달간 서울 종로의 복합 문화공간 반쥴에서 ‘다른 당신들이라는 부제의 ‘목소리와 기타 2013 공연을 펼친다.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박세연 기자 psyon@mk.co.kr/사진 안테나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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