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톱 여배우들의 헤어스타일, 이곳에서 나왔다!
입력 2012-10-12 14:26  | 수정 2012-10-12 14:27


남자 미용사가 흔치않았던 90년대 초, 가족과 주변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미용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미용업계에 문을 두드려 5년 만에 국내 정상 배우들의 헤어 스타일링을 전담하게 된 헤어디자이너가 있습니다.

지독한 가난으로 나이트클럽 디제이와 도박업소 나레이터 등 질풍노도의 어린 시절을 보내기도 했던 그는, 끊임없는 노력과 긍정적인 마인드로 열등감을 극복하고 현재에는 ‘잘 나가는 남성 헤어아티스트로, 또 한류 뷰티업계를 이끄는 기업인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주인공인 김현태 대표를 만나보았습니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입니다.

<아   래>


Q. 어떻게 미용업계에 입문하게 되었나요?

A. 저는 매우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일찍부터 생활력이 강했고, 빨리 돈을 벌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기에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저를 받아주는 나이트클럽 디제이로 활동했습니다. 어린나이의 저를 받아주는 곳은 당시 유흥업소뿐이었는데, 서빙 하는 웨이터는 하기 싫었어요. 막 재미를 붙여갈 즈음 노태우정권이 유흥업소 단속을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그만두게 되었고, 일자리를 찾다가 잠시 도박업소에서 나레이터 활동을 하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언제까지나 이런 부엉이 생활을 할 수 없다고 느꼈죠. 일반 회사에 근무하는 것은 적성에 맞지 않아 생각도 하지 않았고요. 그러던 어느 날 쇼윈도우에 비친 미용사의 모습을 보고 바로 저거다!” 했습니다. 워낙 한번 마음먹으면 바로 진행하는 성격이라 그날로 미용실에 일을 하고 싶다고 찾아갔어요.


Q. 처음 미용실에서 근무할 때도 생활이 어려웠겠네요.

A. 1990년 9월 1일이었어요. 미용실 근무 첫날을 또렷하게 기억해요. 당시에 아무런 기술도 없이 무작정 받아달라고 했는데 한 달에 9만원을 받았습니다. 부모의 완강한 반대가 있었던 저는 집을 나와 독립생활을 시작했는데, 집세가 6만원이었고 미용실까지 가는 교통비를 제하면 남는 돈이 거의 없어 언제나 배를 주렸어요. 미용실에서 하루에 한번 식사를 제공하는데 그때마다 남들보다 4배는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Q. 어려운 시절을 극복하지 못하고 중도 포기하는 사람들도 많은데요. 그런 어려움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지금의 CEO자리에 오르기까지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A. 우선 제가 평생의 스승으로 꼽는 ‘헤어뉴스의 샤니고 스승을 만난 것입니다. 서울로 올라와 만난 샤니고 원장님은 작은 키와 촌스러운 스타일로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저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제 장점을 일깨워 주셨어요. 그 당시 선생님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정말 많이 공부했고, 고객들에게도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노력했어요.

당시 저는 담배를 피웠는데, 담배냄새를 지적하셔서 바로 끊었고요. 숍을 찾는 고객님들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유행하는 향수와 화장품 냄새를 맡고 이름을 달달 외웠어요. 샴푸를 해도 정성을 다해 고객의 기억에 남기려 했구요, 결과적으로 충성고객이 많이 생기고 스승님의 인정도 받았습니다.

Q. 그렇게 기본을 충실히, 완벽하게 배우신 덕분에 스타 디자이너로 거듭나게 되신 거군요?

A. 헤어디자이너로서 성공의 조건이라 하면, 연예인 고객-웨딩신부-파트너 이렇게 3가지를 꼽는데 저는 입문 4년차인 94년에 이 조건을 모두 갖추게 되었습니다. 헤어뉴스를 나와 일본유학을 다녀온 직후인데, 사관학교 같은 헤어뉴스를 근무한 경력과 유학 경험을 인정받아 이경민 포레에 파트타임 미용사로 근무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처음에 만진 웨딩신부의 머리스타일이 고객에게 어울리지 않는 스타일링이라는 혹평을 받아 슬럼프에 빠졌어요. 고민을 하다가 고객마다 다른 두상이나 취향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나니 고객들에게 반응이 너무 좋은 거에요. 입소문을 타면서 고객들이 몰려들었고, 당시 심은하, 고소영, 신애라 등 유명 배우들도 담당하게 되면서 제 이름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Q. 그렇게 스타 디자이너로 이름을 알리시고... 2003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건 라뷰티코아를 설립하시죠? 그 중에서도 남성-스타 헤어디자이너 3인의 조합이라는 게 인상적인데요?

A. 그렇죠, 우선 끌로에, 조성아더폼에서 부원장으로 조직을 하는 등 경영능력을 키웠고 당시 ‘현태 디자이너 하면 탑3에 꼽는 아티스트였기에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리고 당시 유명한 미용실은 모두 조성경, 이경민, 조성아 등 메이크업아티스트들이 운영하고 있었기에, 그들의 그늘에 헤어디자이너들이 상대적으로 가려지는 것을 느꼈어요. 마침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던 민상, 정준 디자이너와 손을 잡고 차별화된 신문화 공간‘을 만들어 보자고 시작하게 됐습니다. 3명 모두 당시 최고의 헤어디자이너로는 꼽혔던 만큼, 라뷰티코아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는데 오픈하자마자 많은 고객이 방문하면서 성공적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Q. 지금까지 라뷰티코아를 운영하면서 큰 위기는 없었나요?

A. 위기라면 큰 위기였고 쓴 실패도 경험했죠. 2008년에 저희는 과감하게 미국진출을 시도했었고, LA와 시카고에 매장을 오픈했었습니다. 그런데 준비하는 과정에서 현지 사정에 밝은 사업파트너가 부도났음에도 무리하게 진행을 했던 게 실수였지요.

게다가 당시 리만브라더스 파산, 서브프라임 등 미국경제 악화로 환율도 급등하면서 재정적으로 큰 위기를 겪었습니다. 결국 3년 만에 미국 매장을 철수를 했지요. 팔 하나 썪으면 잘라서 다른 몸을 살린다는 말이 있듯이, 구조조정도 단행했었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어려운 상황에서 힘이 되주는 진정한 직원들과 파트너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또 고객만큼 직원들도 저에게 최고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Q. 그렇다면, 직원들에게 어떤 CEO가 되고 싶으신가요?

A. 직원들에게 제가 어렵고 무섭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그 말을 들으니 좀 더 내공을 쌓아서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제 경험들과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CEO가 되고 싶고, 나아가서 전 직원들의 고민과 고충을 파악하고 해결해줄 수 있는 CEO가 되고 싶습니다.

Q. 마지막으로 라뷰티코아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향후 목표와 꿈에 대해 말씀해주신다면?

A. 저의 꿈은 아시아에서 최고로 인정받는 뷰티재단을 설립하는 것입니다. 적당한 시간이 왔을 때 제 꿈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계속 발판을 마련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현재에도 한국의 헤어 기술은 아시아시장에서 놀라운 테크닉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한류 열풍을 하고 있는 지금, 그 안에서 ‘한국 스타일‘을 널리 알릴 수 있는 뷰티 살롱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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