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뉴 트렌드] ‘능력만큼 대우받겠다’ 목소리 커져
입력 2011-04-03 13:30  | 수정 2011-04-03 13:33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 /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 / 조현민 대한항공 상무 /
정성이 이노션 고문 / 정지이 현대유엔아이 전무 / 이미경 CJ E&M 총괄부회장


지난 연말 재계 인사, 그중에서도 삼성그룹 인사의 ‘백미는 단연 이부진 사장이었다. 이부진 에버랜드·호텔신라 전무가 부사장을 뛰어넘어 호텔신라 대표이사 사장으로 선임됐다. 오빠 이재용 사장이 91년 입사 이후 만 19년 만에 사장을 단 데 비해 이부진 사장은 만 15년째에 같은 직급에 올랐다. 그뿐 아니다. ‘대표이사 타이틀은 여러모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삼성그룹 72년 역사상 첫 여성 CEO가 등장한 것.

지난 3월 18일 신라호텔 주주총회에서 이부진 사장은 등기이사에 선임됐다. 등기이사는 비등기이사와 달리 이사회에 참여할 권한이 있다. 기업경영에서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는 동시에 그에 대한 법적인 책임도 져야 한다. 그만큼 책임경영을 할 수밖에 없다. 이부진 사장이 3남매 중 가장 먼저 등기이사에 선임된 것 역시 인구에 회자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딸들이 달라졌다. 정확하게는 ‘지분 물려받아 배당이나 받고, 혹여 운 좋게 계열사 하나 떼어 받으면 금상첨화라던 재계 딸들의 생각이 달라졌다. ‘정정당당하게 능력으로 평가받겠다 ‘능력이 닿는 만큼 기업을 경영하고, 자신의 역할만큼 권리를 주장하겠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재계 딸들을 바라보는 세간 시선도 달라졌다. ‘재벌집 아가씨를 넘어 한국 경제계를 이끌어가는 주역 중 한 명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능력만 있으면 딸도 가업을 물려받을 수 있는 것 아닌가라는 인식이 대세다. 그야말로 ‘여풍당당(女風堂堂) 시대다.

이제 딸이 그룹 대표주자로 떠올라도 아무도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는다. ‘아들이 없으면 사위라는 공식은 폐기된 지 오래다. 심지어 능력 있는 딸이 경영에 관심이 없거나 능력이 떨어지는 아들을 대신해 그룹을 책임지기도 한다. ‘빨래엔 피~죤으로 유명한 피죤의 이주연 부회장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생활용품 전문기업 피죤 이주연 부회장은 창업주 이윤재 회장의 장녀다. 이윤재 회장은 1남 1녀를 뒀다. 아들은 현재 교수로 학문에 매진하고 있다. 대신 경영에 관심을 보인 딸이 자연스레 후계자가 됐다.


이처럼 달라진 ‘여풍당당 분위기는 지난 연말 인사에서 그대로 확인된다.

이부진 전무와 함께 이서현 제일기획·제일모직 전무도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막내딸 조현민 대한항공 통합마케팅커뮤니케이션실IMC팀장은 통합커뮤니케이션실 상무가 됐다. 앞서 지난해 초에는 채은정 애경산업 부사장이, 2007년과 2009년에는 정지이 현대유엔아이 전무와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이 승진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부진 삼성가 첫 여성 대표이사

2009년 조선호텔 상무에서 신세계 부사장으로 고속 승진한 정유경 부사장도 관심 인물이다. 정 부사장은 지난 13년간 조선호텔에서 한 우물을 판 ‘호텔 전문가. 호텔업에 몰두하리라 예상됐던 정 부사장이 갑작스레 백화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난 3월 18일에 열린 주주총회에서 신세계는 백화점과 이마트 분할을 최종 승인했다. 일각에서는 계열분리 얘기도 나온다. 정유경 부사장이 백화점을, 정용진 부회장이 이마트를 책임지게 될 것이란 그림이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또 한 명의 딸은 이미경 CJ E&M 총괄부회장이다. 최근 CJ그룹에서 이미경 부회장 파워가 계속 확대되고 있다는 소리가 재계에 퍼지고 있다.

현재 이미경 부회장이 보유하고 있는 CJ그룹 지분은 CJ미디어 1.32%가 유일하다. 그러나 재계에서는 ‘이미경 부회장 어머니인 손복남 고문이 이 부회장에게도 향후 나름의 몫을 주지 않겠나라고 예상한다.

이미경 부회장과 비견되는 인물로 이화경 오리온 미디어플렉스 사장을 빼놓을 수 없다. 이화경 사장은 그러나 현재 오리온그룹 비자금 사태로 75년 오리온에 입사해 일해온 36년 중 가장 어려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맏딸로 99년 대한항공에 입사해 최근 현재 전무로 활동하고 있는 조현아 대한항공 전무도 재계가 지켜보는 여성이다. 74년생으로 미국 코넬대에서 호텔경영학을 전공한 조 전무는 2009년 3월 하얏트리젠시인천호텔을 운영하는 ‘KAL호텔네트워크 대표이사에 올랐다. 2007년 KAL호텔네트워크 등기이사가 된 지 2년 만의 일로, 호텔업계 최초의 여성 대표이사가 됐다.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장녀 현정담 동양매직 상무는 2006년 동양매직에 차장으로 입사했다. 입사 1년 만에 부장, 2009년 1월 상무보로 고속 승진했다. 스탠퍼드대에서 심리학과 경제학을 복수전공하고 MBA를 마친 현 상무는 차장 시절 미국 소비자이론을 적극 도입하는 등 동양매직에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킨 주역으로 유명하다.

이미경 부회장 영향력 커지는 중

현대그룹에는 정지이 현대유엔아이 전무가 있다.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 장녀 정지이 전무는 2004년 현대상선 평사원으로 입사해 재정과 회계 분야 실무를 맡는 등 평범하게 후계자 수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2006년 그룹의 IT 계열사인 현대유엔아이 상무로 승진한 데 이어 2007년에는 전무가 되는 등, 고속 승진가도를 달리며 오너가 되기 위한 길을 차근차근 밟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처럼 ‘여풍당당 시대지만 상대적으로 아직 이 같은 분위기에 덜 휩쓸려 있는 그룹과 딸도 있다. 대표적인 곳이 현대자동차그룹과 LG그룹이다.

현대차그룹 정몽구 회장은 1남 3녀를 뒀다. 외아들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은 한창 경영 수업을 받고 있다. 그러나 딸 정성이, 정명이, 정윤이 씨는 아들과 달리 정중동 행보다. 그나마 전무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이는 현대해비치호텔&리조트 전무인 정윤이 씨뿐이다. 정성이 씨와 정명이 씨는 고문이라는 이름으로 경영 일선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다. 장녀 정성이 씨는 이노션 고문, 정명이 씨는 현대커머셜 고문이다.

이노션은 현대차그룹 계열 광고대행사. 정성이 고문은 이노션 지분 40%를 보유하고 있는 최대주주다. 현재 이노션에는 전문경영인이 있지만 실제로는 정성이 고문 입김이 만만치 않다는 전언이다. 이노션 창립 당시 대표이사와 마케팅본부장을 정성이 고문이 직접 영입했다고도 알려져 있다. 장녀가 직접 움직이는 만큼 이노션은 급성장을 계속했다. 지난해 이노션 취급액은 2조7000억원가량. 업계 1위 제일기획을 턱밑까지 따라잡았다.

정명이 현대커머셜 고문은 사실 본인 스토리보다 남편 정태영 현대캐피탈·카드 사장 스토리가 더 유명하다.

정윤이 현대해비치호텔&리조트 전무는 어머니 이정화 여사가 관여했던 현대해비치호텔&리조트 사업에 열중하고 있다. 호텔에 필요한 집기와 장식물 등 필요한 것을 직접 사다 놓을 정도로 꼼꼼한 스타일이다.

현대차그룹 딸들이 수면 밑에서 활동하는 것은 故 정주영 명예회장 때부터 이어져온 현대가의 ‘그림자 내조 가풍 때문이다. LG그룹 역시 사정이 비슷하다. LG그룹은 예로부터 여성이 경영 현장에 나타난 적이 없다. 유일한 예외 인물이 구지은 아워홈 상무다. 2004년부터 아워홈 외식사업부 총괄 상무직을 맡고 있다. 구 상무 어머니는 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둘째 딸 이숙희 씨이고, 아버지는 구자학 아워홈 회장(故 구인회 LG그룹 창업주 3남)이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과는 사촌지간이다. 결국 구 상무가 경영 일선에 나선 것은 범LG그룹 분위기라기보다는 삼성그룹 분위기 영향을 더 받았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한편 딸들의 약진이 트렌드가 되고는 있지만 이들이 맡고 있는 업종이 여전히 유통, 광고, 호텔, 서비스, 디자인 등 전통적인 여성 영역에 머물러 있다는 점은 넘어야 할 산이다. 그런 점에서 삼성석유화학 지분 33.2%를 보유하고 있는 이부진 사장의 미래 모습에 관심이 쏠린다. 이부진 사장이 여성 최초로 중후장대 기업을 책임진다면 한층 업그레이드된 ‘여풍당당 시대를 여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소연 기자 sky6592@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600호(11.04.0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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